영어와 피아노 by 명품추리닝

직장에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점심시간에 미국인 동료를 마주친다. 마침 공부하고 있는 <겨울왕국> 회화에 도움이 될 겸,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이 벌써 두 달 전이다. 처음에 그녀의 이름을 듣고 매우 놀랐다. 그때 내가 흥미롭게 읽던 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이름 'J'였기 때문이다. J가 우쿨렐레를 잘 연주하며 현재 아마추어 뮤지션으로 활동한다는 점 덕분에 내 미천한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와 매번 반갑게 '10분 수다'를 떨 수 있었다. 

- I can play the ukulele and I made the ukulele club(베짱이 클럽)!!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 새로 라이브 카페가 오픈했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어 J에게 함께 공연을 보러 가자고 했다. 흔쾌히 OK 사인을 받았다. 데이트 약속을 잡은 것처럼 설레고 기뻤다. 하지만 더 이상 '10분 수다'는 통하지 않을 거라는 현실적인 걱정이 곧 머릿속을 지배했다. 어떡하지, 통역이 필요할 것 같아, 그러니 영어전공자를 초대하는 거야, 난 역시 똑똑해! 스스로의 상황판단 및 문제해결 능력을 칭찬하며 영어전공자 친구와도 약속을 잡았다. 이제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왜 이 친구는 하필 이럴 때 약속을 취소하는 걸까.    
결국 약속한 공연일에 통역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J는 공연장을 잘 찾아왔다. 함께 기타 연습을 하는 다른 미국인 친구 E를 데려와 나에게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그렇게 셋이서 함께 첼로 듀오 공연을 감상했다. 모차르트 첼로 이중주가 상당히 중후하고 멋졌다. <하얀 거탑> OST인 'B Rossette'를 첼로 두 대와 피아노로만 들어도 아름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지막 곡이 끝나자 J와 E는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며, 이 카페와 오늘 공연이 매우 멋지다고 말했다.   

내가 이 무대 위에서 연주할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E가 갑자기 나에게 [Do you know Bill Evans?]라고 물어오는 바람에 (영어로 빌 에반스를 설명하는 것보다 피아노를 치는 게 쉬워서) 나는 돌발적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Walzt For Debby'를 연주했다. 그리고 좌석으로 돌아오니 주문하지 않은 치킨 샐러드가 놓여져 있었다. 기대에 없던 사장님의 풍성한 서비스에 그래미 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마음이 흡족해졌다. 내친 김에 다시 무대에 올라가 서너 곡을 연주하고 내려오는데, E가 급하게 무대 위로 올라오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는 내가 연주했던 'Fly me to the moon'을 다시 반주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즉흥적인 재즈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핸섬한 외국인 남자가 갑자기 등장해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니 첼로 연주때보다 더 커다란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게다가 평소 연습하던 Fly me to the moon의 오른손 멜로디를 E가 불러준 덕분에, 내 오른손은 멜로디의 한계를 벗어나 더 다양한 컴핑과 대선율을 구사할 수 있었다. 아, 재밌어라, 이런 게 진짜 재즈구나. 이어서 E는 내 반주에 맞춰 'All of me'를 불렀다. 앵콜과 박수소리가 크게 들려왔지만 즉흥 연주는 여기까지였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무대에서 내려왔다. 또 만나서 연주할 기회가 있을 게다. 그들과 [See you soon]이라 인사한 순간, 내 영어 공포증도 한뼘 줄어들어 있었다.  

덧글

  • 꿈이길 2018/05/13 01:47 #

    우와 정말 즐거우셨겠어요. 멋지네요.
  • 명품추리닝 2018/05/13 09:44 #

    감사합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ㅎ
  • trammondog 2018/05/13 05:56 #

    멋지십니다!! 혹시 동영상 찍어두셨으면 공유를... :D
  • 명품추리닝 2018/05/13 09:45 #

    아마도 사진이나 동영상은 J에게 있을 듯한데... 물어봐야겠어요 :)
  • 날라리 2018/05/13 08:28 #

  • 명품추리닝 2018/05/13 09:45 #

    감사해요^^
  • 이요 2018/05/13 09:20 #

    우와...멋져요. 즉흥 재즈란 이런 것이군요!!
  • 명품추리닝 2018/05/13 09:47 #

    재즈는 정말 매력적인 음악이에요. 열심히 배워두길 잘 했어요~^^
  • pimms 2018/05/19 15:08 #

    영화 같은 이야기예요 ^^
  • 명품추리닝 2018/05/19 18:02 #

    감사합니다. 현실은 시트콤 같지만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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