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벌거숭이들 by 명품추리닝

벌거숭이들 - 6점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소담출판사
화구가 하나뿐인 가스풍로에 주전자를 얹고 홍차를 우렸다. 이 방에는 식탁이 없다. 식탁을 놓을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스미는 침대에 앉아 아침을 먹는다. 달리 가구라 부를 만한 것은 책상과 책꽂이밖에 없다. 그리고 붙박이 옷장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아스미는 좁은 이 방이 마음에 든다. 에어컨을 조금만 틀어도 금방 시원해지고 청소도 편하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침대에 누운 채 책꽂이에서 책을 꺼낼 수 있고, 식기를 헹군 후 돌아서면 그곳이 옷장이다.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두 걸음 반, 책상까지는 두 걸음, 싱크대에 있는 작은 조리공간까지는 한 걸음이면 갈 수 있다. p.91
아스미의 일상을 살짝 엿보면서 그녀와 비슷한 공간에서 밀크티를 우려마시는 나를 투영해 본다. 하지만, 아스미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전 연인과 섹스파트너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모, 모모의 파트너이면서 모모의 친구 히비키를 유혹하는 사바사키, 유부녀이면서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간 히비키 등이 주요인물인데, 이들의 불투명한 감정선이 소설 전체를 지배한다. 이러한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여전히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이기 때문인가.

오히려 장년에 처자식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야마구치에게는 우직한 멋이 있다. 20여년간 성실하게 가족을 부양한 후 "집이고 돈이고 다 당신에게 줄게. 난 몸만 나갈 거야."(81)하며 사랑을 찾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나름대로의 묵직한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1년여 전, 그야말로 맨몸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무렵, 이 집의 분위기-카즈에 자신과도 비슷해서 꾸밈없고 소통이 잘되는 분위기-에 야마구치는 살 것 같았다. 자신의 인생에 이런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니, 라는 신선한 놀라움. 이곳이 나의 마지막 정착지다, 라는 감상을 야마구치는 즐겨 입 밖에 냈고(그 말을 듣는 것이 카즈에도 기쁜 눈치였다), 거기에는 약간 자학적인 기분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지만-가와사키 집에 비하면 이 오래된 집은 많이 보잘것없었기에-, 그래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고, 후련하면서도 일종의 밝고 평온한 기분에서 비롯된 말이기도 했다. p.127 
새로운 사랑은 카즈에의 죽음으로 짧게 막을 내린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야마구치의 마지막 정착지가 되었다. 얄팍한 기회주의로 전처에게 돌아가 편안한 노후를 보낼 법도 한데, 그는 정직하게 노동하며 새로운 인생을 꾸려나간다. 아스미가 야마구치에게 느낀 인간적인 호감만이 강하게 공감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