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암스테르담 by 명품추리닝

암스테르담 - 8점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Media2.0(미디어 2.0)
이언 매큐언의 소설 <암스테르담>은 '재치 있는 레스토랑 비평가이자 사진 작가였고 대범한 정원사였으며 외무장관의 정부였던 여자(13)' 몰리 레인의 장례식에서부터 시작된다. 저명한 작곡가 '클라이브', 일간지 편집국장 '버넌', 영국 외무장관 '가머니', 출판재벌 '조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몰리'의 팜므파탈적 매력에 호기심이 일었지만, 소설은 남겨진 네 명의 남자들에게 일어나는 갈등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위선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만, 몰리의 연인이었던 네 남자들에게선 그들이 거머쥔 사회적 성공 때문인지 그 명암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작곡가 클라이브의 예를 들자면 이렇다.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을 무기로 모든 책임을 벗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오만은 질색이었다. 클라이브의 친구들 중에는 필요할 때마다 천재라는 으뜸패를 내세우며 여차하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부류가 있다. 그들의 부재로 인해 어떤 불상사가 벌어진다 해도 그건 단지 직업 성격상 불가피한 일이며 그런 연출이 대중들로 하여금 그들이 부여받은 소명을 더욱 우러러보게 할 뿐이라고 믿었다. 이런 유형들은(무엇보다 소설가가 최악이다) 친구와 가족에게마저 작업 시간뿐 아니라 조는 시간, 산책 시간을 비롯하여 침묵하는 매 순간과 우울증과 만취 상태가 모조리 변명의 여지가 있는, 고도의 목적을 담은 행위라는 믿음을 주려고 집요하게 애쓴다. 클라이브가 보기에 그건 평범함을 감추려는 제스처에 불과했다. 그 역시 예술의 숭고함을 의심치 않았지만 부당한 행동이 예술의 일부는 아니었다. 한 세기에 한두 명 정도 예외는 있을 수 있다. 베토벤 같은 사람 말이다. p.79
 
하지만, 이렇게 예술가의 태도를 강조한 클라이브 역시 등산 도중 목격한 '강간범과 마주친 여자'를 외면하지 않았던가. 그는 자유로운 영혼을 무기로 여자의 비명소리보다 더욱 중요해진 자신의 작곡 작업에 몰입했는데, 아마도 강간범과의 몸싸움에 자신이 없었으리라. 과거 내가 지하철에서 치한을 만나고 한 양복 입은 남자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머뭇거리는 어투로 [경찰에 신고하세요]라는 대답을 들었던 상황이 오버랩되었다. (집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내 오라버니는 치한보다 양복 입은 남자를 더 욕했었다.) 

이언 매큐언은 소설을 통해 타인에게 엄격하며 자신에게 관대한 인물들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꽤 오랜 세월 유지되었던 클라이브와 버넌의 우정 또한 타이밍이 어긋난 엽서에 의해 금세 밑바닥을 보이는 것이 안타까웠다. 모든 비극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되니까.

등에 꽂힌 비수처럼, 상처 위에 뿌린 소금처럼, 시간이 갈수록 그 엽서는 지난 하루 동안 겪은 크고 작은 모욕의 표상처럼 느껴졌다. p.171
머리만 굴리다가는 비겁자가 되기 십상이다. p.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