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피싱 최장 기록을 갱신하다 by 명품추리닝

몇주 전, 어느 맑은 오후에 나는 매우 특별한 일을 경험했다. 무려 35분 동안이나 보이스 피싱을 당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내가 여태 받아온 금융사기 전화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통화 시간이었다. 내가 경찰과 검사를 사칭한 남자들로부터 들은 내용은 이랬다. 내 이름으로 된 대포통장이 타 지역에서 발급되어 범죄에 사용되었는데, 내가 그 범죄의 공범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공범이 아니라 개인정보 유출을 당한 피해자라면 몇 가지 증언을 해야 혐의가 풀린단다. 결정적으로 그들로부터 내가 사용하고 있는 계좌가 안전한 상태가 아니니 잔액조회를 해보라는 말을 듣고, 나는 마침 코 앞에 있는 은행에서 잔액조회까지 했더랬다. 그제서야 피어오르던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져, 나는 내 휴대폰을 은행 직원에게 넘겨주었다. 물론, 그 순간 통화는 끊겼다. 

보이스 피싱의 뻔한 레퍼토리에 내가 35분이나 말려들었다는 사실에, 당시에는 무척이나 분하고 쪽팔린 심정이었다. 하지만, 몇주 지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보이스 피싱을 당하는 동안에는 다른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를 막아준 게 아닌가. 게다가 내게 보이스 피싱을 걸어왔던 남자들은 그 오랜 시간을 소요하며 다 잡았다 생각한 고기를 놓친 셈이니, 나에게 무척이나 약이 올랐을테고, 결과적으로 다음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시간도 지체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고쳐 생각하자, 나의 자부심은 국위선양을 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것마냥 높이 차올랐다.

삶에 대한 태도란 이토록 중요한 것! 이제 발 뻗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어야겠다. 

덧글

  • fendee 2014/05/30 00:25 #

    식겁하셨겠네요. 역시 긍정의 힘이 중요하죠.
  • 명품추리닝 2014/05/31 00:45 #

    삶의 고통을 해학으로 승화시켰답니다~
  • enif 2014/05/30 22:21 #

    "내가 보이스 피싱을 당하는 동안에는 다른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를 막아준 게 아닌가" 굿!!!!!!!!!!!
  • 명품추리닝 2014/05/31 01:03 #

    그 선량한 시민 중에는 enif님도 있다는 사실~ 이러한 저에게 감사인사를 하러 오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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