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여행04 아마데우스 호텔 (Hotel Amadeus) by 명품추리닝

그라나다의 화려한 알람브라 궁전도, 가우디의 신성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도, 마드리드의 웅장한 프라도 미술관도 모두 대단했지만, 내게 스페인 여행의 백미는 세비야의 작은 호텔 '아마데우스'였다. 고전시대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기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마데우스 호텔 로비와 객실에는 다양한 클래식 음악 관련 소품이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특히, 웰컴드링크로 준비된 온더락의 샹그리아와 녹차는 40도를 웃도는 세비야의 날씨를 잊게 할 정도로 청량했다. 아마데우스에 머무는 3박 4일 동안 나는 점심 저녁으로 샹그리아를 몇 잔씩 마셔댔는데, 어떤 직원도 나를 말리거나 눈치로 압박하지 않았다.  

피아노 신동이 주인공인 이 호텔에 그랜드 피아노가 없다면 그 이름을 '아마데우스'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로비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가 혹시 스타인웨이인가 하고 봤더니 조금 연식이 있는 야마하였다. 이전에 한 대기업 로비에서 연주했던 야마하 C7x 신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 관리된 그랜드 피아노의 소리는 맑고 깊었다. 시에스타를 제외하면 환한 시간에 언제든 연주 가능한 이 피아노는 거의 내 전용이 되었다. 세비야 여행 마지막 날 체크아웃을 기다리며 Let it go를 연주하자, 로비에 있던 금발 여자아이가 신나게 노래를 따라불렀다. 첫날 모차르트 소나타를 연주할 때는 아무도 반응을 안 하더만. 아무래도 21세기 지구촌에서는 디즈니가 모차르트보다 높은 위상을 가진 것 같다.   

로비의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는 시에스타 시간에는, 정말 낮잠을 자거나 1층의 작은 방음실에 들어와 문을 닫고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하면 된다. 샹그리아 2~3잔을 마시고 연주하는 피아노는 흥분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이다. 창문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피아노 소리를 듣고 박수를 쳐주기도 했다. 눈내리는 연말에 추억하는 스페인의 여름, 그 계절이 몹시 그리운 저녁이다.   

2017 다이어리 영화 인터뷰 by 명품추리닝

Q. 명품추리닝 님의 다이어리 기록을 보니 2017년에도 많은 영화를 보셨군요. 
A. 네, 그렇습니다. 2018년도에는 무난하게 롯데시네마 VIP GOLD 회원이 될 것 같습니다.
Q. 축하드립니다. 각각의 영화제목에 유치한 화려한 장식을 해놓으셨군요.  
A. 네, 영화 리뷰를 쓰기는 귀찮고, 영화 내용은 기억하고 싶었으니까요.
Q. 일종의 그림일기인가요? 왠지 초등학교 방학숙제가 생각나는데요. 
A. 비슷합니다.
Q. 예를 들어,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윤곽선을 설명해주신다면요?
A. 청색은 타쿠미가 사는 도쿄의 건물, 적색은 미즈하의 머리끈을 상상하며 그렸습니다.
Q. 아하, 두 가지 반짝이펜으로 각각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을 나타내셨군요.
A. 네, 간단합니다. 기억하기도 쉽고요.
Q. 그렇게 생각하니 <Billy Elliot>, <Bueaty and the Beast>, <Hidden Figuars>의 장식들도 쉽게 이해가 됩니다. 
A. 영화를 보신 분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Q. 하지만 <Ghost in the Shell>이 나타내는 의미는 잘 모르겠습니다. 
A. 주인공이 네트워크에 접속할 때 목 뒤에 꽂는 두 선을 상상하며 그렸습니다. 
Q. 저는 청진기인 줄 알았습니다. <Life>는 우주 SF 영화이니, 별 모양인가요?
A. 아니에요! 외계인 모양입니다. 저 빨갛게 벌어진 입이 보이지 않습니까?!
Q. 흠흠, 죄송합니다. 다시 보니 외계인처럼 생겼네요. 
A. 그럼 이제 <아버지와 이토씨>에 그려진 숟가락도 잘 보세요. 
Q. 영화 속 아버지에게 있던 '숟가락 도벽'이 인상깊게 다가오셨나보군요.  
A. 네. 그리고 저 숟가락으로 백미당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될 것 같았어요.
Q. <Get Out>으로 넘어가죠. 저 윤곽선은 포스터에서도 본 것 같은데...
A. 크리스가 저 소파에 앉아 최면에 걸렸었지요. 그럼 마지막 <Flipped>도 맞춰보세요.
Q. 주인공이 매일 올라갔던 나무를 그리셨네요.
A. 줄리가 가진 동심을 함축하고 있는 아이템이니까요.
Q. 전체적인 디자인이 참... 초등학생의 그림일기를 엿보는 기분입니다. 
A. 저도 늘지 않는 제 그림실력에 충분히 절망하고 있습니다. 
Q.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런 인터뷰에 응하신 겁니까?
A. 주말이 너무 심심해서요. 이제 <셜록> 보러 가야겠어요. 


[도서] 쌤통의 심리학 by 명품추리닝

쌤통의 심리학 - 8점
리처드 H. 스미스 지음, 이영아 옮김/현암사

17세기 작가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가 남긴 명언처럼 "자신의 결점이 없다면 남의 결점을 알고 그렇게 기쁘지 않을 것이다." p.35

치버에 따르면, 사람들은 여전히 술을 마시지만 취하지는 않는다. 말인즉슨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창피한 꼴을 보이지 않고 처신을 더 잘한다는 뜻이다. 과음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알코올중독까지 이긴 것이다. p.53

그 결과, 개인들보다는 집단 간의 경쟁이 더 치열했다. 이런 '개인-집단 불연속성 효과'는 매우 강력하고 쉽게 반복된다. 왜일까? 첫째, 나 개인의 편협한 이익보다는 우리 집단의 이익을 위하는 편이 덜 탐욕스러워 보인다. 둘째, 우리는 충실한 일원으로서 자기 집단을 돕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집단을 위한 일을 할 때에는 자신이 탐욕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뿌듯해진다. 셋째, 우리는 다른 수많은 부정적 자질과 마찬가지로 경쟁심을 개인보다는 외집단의 탓으로 돌리려 한다. 다른 집단은 믿기 어려우니 경계해야 한다며 말이다. 마지막으로, 어떤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더라도 개인이 아닌 집단의 행동처럼 보이기 때문에 혹시 그 결과가 나쁘더라도 혼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p.88

카네기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동기가 고상해 보이도록 자신의 처신을 합리화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아무리 나쁜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동기를 긍정적으로 해석해낸다. p.107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인용하자면 가끔은 "유혹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다." p.134

세상이 자업자득의 원리가 실현되는 공정한 곳이라고 믿는다면, 이 믿음에 맞는 방식으로 모든 사건을 구성하게 된다. 첫 번째 조건에서, 관찰자들은 피해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그를 동정했다. 두 번째 조건에서는, 무고한 피해자가 계속 억울한 전기 충격을 받을 거라는 사실을 듣고 찜찜한 느낌이 들자 그 피해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마땅한 짓을 저질렀을 거라고 합리화했다. 러너와 시먼스는 우리가 공정한 세상이라는 동기를 필터로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행불행을 해석하고 그에 반응한다고 주장했다. p.144

이렇듯 나에게 잘못한 사람의 고통을 내가 직접 유발하기보다는 목격하는 편이 훨씬 더 유리하다. 죄책감 없이, 그리고 보복당할 위험 없이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p.160

질투 섞인 적대감에는 뭔가 독특한 점이 있다. 질투를 느끼는 사람들은 그 대상이 자신과 똑같은 정도로, 혹은 더 심하게 고통받을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의 손해도 감수하려 한다. 자멸적인 행동 같지만, 질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절대적인 의미의 이득을 얻는다해도 질투 대상의 상대적인 우월함을 보고 느끼는 고통을 달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p.199

우리는 남의 능력을 존경하긴 하지만, 능력이 너무 커 보일 때에는 그 사람을 선뜻 좋아하지 못한다. p.205

나는 사람들이 질투를 경험한 사례들을 많이 수집했다. 질투의 대상이 탐나는 재능이나 물건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친절하고 착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질투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좌절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질투를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부당한 악감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대상을 미워할 만한 이유를 찾는다. 예를 들어 '건방지다'거나 '얄밉다'거나. 그런데 질투의 대상에게 호감을 느낄 만한 자질이 있다면 악감정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만한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p.209

우리는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저울질할 때, 자신이 더 좋아하는 우월한 자아 이미지를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현실에서 명백히 보이는 결점이 있다 해도, 그 자아는 스스로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무례함과 불의와 싸우는 중요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일종의 자체적인 신과도 같은 이 자아는 자기 이익에 방해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복수를 가하는 공상적인 역할 놀이를 한다. 이 자아는 질투에 쉽게 빠지지 않는다. 아니, 우리가 스스로를 그렇게 납득시킨다. 질투를 인정하는 건 품위가 떨어지고 보기 흉한 짓처럼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은 이 옹졸한 감정 때문에 힘들지 몰라도 우리는 아니다. p.216

표면적으로 히틀러는 자신의 질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유대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종임을 믿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을 혐오하고 강렬하게 경멸하는 거라고 독자들을 납득시키려 애쓴다. p.241
 <쌤통의 심리학>은 '질투하는 인간'을 진화적, 역사적, 문학적으로 아울러 보여주는 책이다. 질투에 사로잡힌 인간이 저지르는 옹졸한 행동도 다양한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척박한 환경에서 질투심을 발달시켜 살아남은 인간은, 동시에 이 자연스러운 감정때문에 평생을 괴로워하게 되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란 기쁨도 느끼고 불쾌감도 느끼는 존재다. …… 분노, 반감, 피로함, 쌤통 심리. 내겐 이 모두가 인간 경험의 일부이다. 그 감정이 사람을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끔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p.305
내 블로그에 겹겹이 쌓여있는 '분노, 반감, 피로함, 쌤통 심리'를 바라볼 때마다 이런 감정들만 선택적으로 삭제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이곳에서나마 좀 더 교양있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비춰지고 싶기 때문이리라. 여태 튼튼하다고 믿어왔던 자존감의 한계를 문득 실감하는 밤. 춥다. 더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는 하루하루를 보내야겠다. 

2018 달과노트 다이어리(구슬안개) by 명품추리닝

11월말, 아직 2017년이 한 달도 넘게 남아있건만 마음이 급했는지 벌써부터 내년도 다이어리를 주문했다. 사은품도, 할인이벤트도 없지만 그래도 무료배송이라 고마운 9,800원짜리 2018 달과노트 다이어리(구슬안개).  

내년도 Yearly Plan을 보며 연휴를 따져보는 일은 월급쟁이의 커다란 기쁨이요, 때론 슬픔이다. 투톤 컬러로 토요일과 일요일을 표시하니 일주일이 한눈에 들어와 보기에도 좋고 실용적이다. 

달과노트 다이어리의 최고 장점은 먼슬리 페이지가 150g으로 두꺼워 탄탄하고 뒷비침이 거의 없다는 점. 다이어리 꾸미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다. 촌스러운 표지 때문에 배스킨라빈스 다이어리와 비교하며 마지막까지 고민했으나, 결국 내지의 우수성에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사실 지금도 배스킨라빈스 다이어리(몰스킨 핑크)의 우아하고 세련된 표지가 아른거린다. 이 달과노트 내지에 배스킨라빈스 표지를 씌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보다, 올해 쓰고 있는 2017 달과노트(공룡산책)에 정이 듬뿍 들었기에 고급스런 몰스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왠지 선자리에서 만난 재벌 2세(17,500원)를 뿌리치고 가난하지만 내게 맞는 오랜 연인(9,800원)과 결혼하는 기분이다.

손때가 많이 탄 2017 버전과 새로 사용하게 될 2018 버전. 이전의 2015~2016 비교샷이 떠오르며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앞으로도 매년 손때 묻은 다이어리를 차곡차곡 모아가야 하겠다.  

"엄마, 엄마가 지금 쓰는 다이어리(Simplanner) 신제품 나왔어."
"어, 이거 좋아! 쓰기 편해."
"내년 것도 사줄게, 5가지 디자인 중에 골라봐."
"하늘색."
"강아지 모양이네."
"응, 초롬이 보고싶다."
"나도."

[도서] 82년생 김지영 by 명품추리닝

82년생 김지영 - 10점
조남주 지음/민음사

 

 
소설 속 김지영은 사회적인 시선으로 볼 때 나보다 가진 게 많은 여성이다. 그녀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학자금 융자 없이 대학교를 졸업했고, 결혼적령기에 성실하고 자상한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평균적인 여성이 우리나라에서 겪는 어려움은 과장된 엄살로 느껴지지 않았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우리나라 여성들의 한숨이 김지영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진짜야. 국민학교 때는 오 남매 중에서 엄마가 제일 공부 잘했다. 큰외삼촌보다 더 잘했어."
"근데 왜 선생님 안 했어?"
"돈 벌어서 오빠들 학교 보내야 했으니까. 다 그랬어. 그때 여자들은 다 그러고 살았어."
"그럼 선생님 지금 하면 되잖아."
"지금은, 돈 벌어서 너희들 학교 보내야 하니까. 다 그래. 요즘 애 엄마들은 다 이러고 살아." p.36
내 어머니도 이렇게 살았다. 삼촌들은 대학에 갔지만,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 후 집안의 생계를 책임졌다. 20여년 전, 어린 마음에도 그런 엄마의 희생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 대에는 달라질 거라고 했다. 2000년대에 들어 분명 제도적으로 개선된 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과의 평등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82년생 김지영>은 그 제도와 현실의 간극에 주목하는 소설이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그날 아버지에게 무척 많이 혼났다. 왜 그렇게 멀리 학원을 다니느냐, 왜 아무하고나 말 섞고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 그렇게 배우고 컸다. 조심하라고, 옷을 잘 챙겨 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고.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p.68

가해자들이 작은 것 하나라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동안 피해자들은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p.156
울컥하면서도 후련하고 다시 암담해지는 기분이 드는 현실적인 소설. '딸이 살아갈 세상은 제가 살아온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되어야하고, 될 거라 믿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딸들이 더 크고, 높고, 많은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178)라고 끝맺는 작가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밥벌이에 매진하는 동안 잊고 있었던 페미니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공연] 종묘제례악 by 명품추리닝

평일 저녁 108배를 하며 문득 지난 5월에 관람했던 종묘제례악이 떠올랐다. 왜 뜬금없이 옛 조선 왕들의 제사 음악이 생각났을까? 아마도 내가 108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종묘제례악과 108배 모두 '지루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따분한 것을 참지 못하는 나는 신성한 108배 중에도 온갖 쓸모없는 망상을 곁들이는데, 이번 주 망상의 주제가 우연히 종묘제례악이 되었던 모양이다. 

64명의 무용수가 대규모의 악대에 맞춰 춤을 추는 도입부는 장엄하고 격조가 있었다. 하지만 공연 내내 길게 늘어지는 음과 단순한 안무의 반복을 마주하다보면, 처음의 감동은 맑은 날의 아침이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과거의 내가 중요 지식으로 암기했던 종묘제례악의 역사와 연주 순서. 물론, 지금은 모두 망각한 상태이다. 그리고 실제 공연을 관람하자 '옛날 귀족들은 정말 이 음악을 끝까지 엄중한 마음으로 들었을까'하는 의문이 절로 생겨났다. 

저녁 8시의 야외 공연, 춥고 배고픈 상태에서 연주 순서를 마주하니 또 왕족 모독적인 망상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공연의 제목은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 아닌 종묘제례주(宗廟祭禮酒). 관객들이 공연을 관람하며 '진찬례'의 음식을 맛보고,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의 제례주를 마시면 좋겠다. 경복궁 주변 한정식 식당과 전통주 회사들의 협찬도 고려해볼 만하다. 단, 배부른 식사보다는 에피타이저 정도의 양으로. 제례주는 부드러운 첫 잔(5도)으로 시작하여 강렬한 세 번째 잔(40도)으로 마무리. 공연 후 기념품 가게에서는 종묘제례주를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하고, 이곳에서 구매한 술은 협찬한 식당에서 저렴한 콜키지 금액으로 마실 수 있다. 아아, 이것이 바로 한국전통문화를 활용한 창조 경제인가. 108배를 하며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내가 정말 대단하다.   

[도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 by 명품추리닝

너무 시끄러운 고독 - 10점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문학동네
보흐밀 흐라발(1942~1997)은 '프라하의 카렐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1939년 나치에 의해 대학이 폐쇄된 뒤에는 공증인, 서기, 창고업자, 전보 배달부, 전신 기사, 제강소 노동자, 철도원, 장남감 가게 점원, 보험사 직원, 약품상 대리인, 단역 연극배우, 폐지 꾸리는 인부 등등을 전전'(135, 옮긴이의 말)하며 글을 썼다. 밥벌이의 고단함을 몸으로 겪은 작가의 글이라서일까, 주인공 '한탸'의 삶에는 녹진한 피로와 고독이 스며들어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책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세상의 종교재판관들이 책을 태우는 것도 헛일이다. 가치 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p.11
내가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방을 꿈꾸는 것처럼, 폐지 압축공인 한탸는 폐지 압축기와 헌책들로 장식된 방을 꿈꾼다. 이 소박한 꿈을 이뤄내기는 또 왜 이렇게 힘든지. 그에게는 경제적, 감정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카멜레온처럼 정체성을 이리저리 바꾸는 교묘함도 없다. 그저 섬세한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결핍된 현실을 풍요롭게 만들려는 애틋한 노력이 이어질 뿐. 마지막이 되어서야 떠오른 과거의 이름모를 사랑이 반가우면서도 슬프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26)는 탈무드의 구절을 비로소 실현시킨 것일까.
집시 여자가 밑에서 보내는 메시지 하나가 연줄을 타고 올라간다. 메시지가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며 전진해 마침내 나와 닿을 거리에 이른다. 나는 손을 내민다...... 어린아이가 쓴 듯한 큼직한 글씨가 쓰여 있다. 일론카. 그렇다, 이젠 분명히 알 수 있다.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p.132


[도서] 벌거숭이들 by 명품추리닝

벌거숭이들 - 6점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소담출판사
화구가 하나뿐인 가스풍로에 주전자를 얹고 홍차를 우렸다. 이 방에는 식탁이 없다. 식탁을 놓을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스미는 침대에 앉아 아침을 먹는다. 달리 가구라 부를 만한 것은 책상과 책꽂이밖에 없다. 그리고 붙박이 옷장이 하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아스미는 좁은 이 방이 마음에 든다. 에어컨을 조금만 틀어도 금방 시원해지고 청소도 편하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침대에 누운 채 책꽂이에서 책을 꺼낼 수 있고, 식기를 헹군 후 돌아서면 그곳이 옷장이다. 침대에서 화장실까지 두 걸음 반, 책상까지는 두 걸음, 싱크대에 있는 작은 조리공간까지는 한 걸음이면 갈 수 있다. p.91
아스미의 일상을 살짝 엿보면서 그녀와 비슷한 공간에서 밀크티를 우려마시는 나를 투영해 본다. 하지만, 아스미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전 연인과 섹스파트너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모, 모모의 파트너이면서 모모의 친구 히비키를 유혹하는 사바사키, 유부녀이면서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간 히비키 등이 주요인물인데, 이들의 불투명한 감정선이 소설 전체를 지배한다. 이러한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여전히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이기 때문인가.

오히려 장년에 처자식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야마구치에게는 우직한 멋이 있다. 20여년간 성실하게 가족을 부양한 후 "집이고 돈이고 다 당신에게 줄게. 난 몸만 나갈 거야."(81)하며 사랑을 찾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나름대로의 묵직한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1년여 전, 그야말로 맨몸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무렵, 이 집의 분위기-카즈에 자신과도 비슷해서 꾸밈없고 소통이 잘되는 분위기-에 야마구치는 살 것 같았다. 자신의 인생에 이런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니, 라는 신선한 놀라움. 이곳이 나의 마지막 정착지다, 라는 감상을 야마구치는 즐겨 입 밖에 냈고(그 말을 듣는 것이 카즈에도 기쁜 눈치였다), 거기에는 약간 자학적인 기분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지만-가와사키 집에 비하면 이 오래된 집은 많이 보잘것없었기에-, 그래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고, 후련하면서도 일종의 밝고 평온한 기분에서 비롯된 말이기도 했다. p.127 
새로운 사랑은 카즈에의 죽음으로 짧게 막을 내린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야마구치의 마지막 정착지가 되었다. 얄팍한 기회주의로 전처에게 돌아가 편안한 노후를 보낼 법도 한데, 그는 정직하게 노동하며 새로운 인생을 꾸려나간다. 아스미가 야마구치에게 느낀 인간적인 호감만이 강하게 공감된 소설이었다. 


[영화]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1999) by 명품추리닝

(스포일러 주의)

매혹적인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낸 <리플리(1999)>는 잔혹하면서도 슬픈 영화다. 상류사회에 대한 열망과 질투, 그로부터 파생된 첫 살인이 리플리에게 거짓된 삶을 부여한다. 리플리의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다보면, 그의 거짓이 드러날 위기마다 함께 긴장하며 사이코패스의 심리에 공감하는 묘한 경험도 하게 된다. 탄탄한 대본과 매력적인 캐릭터 덕분일 게다. 젊은 시절의 맷 데이먼과 주 드로는 또 얼마나 미남인지. 거기다 리플리(맷 데이먼)와 피터(잭 데이븐포트)의 피아노 연주도 들을 수 있다. 

- 당신은 과거를 지하 방에다 두고 문을 잠근 채 다시는 가지 않는 거 안 해요?
- 그러죠. 물론 전 건물 전체가 필요하지만요.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이어진 피터의 대답이 그의 연주만큼이나 대담하다. 그리고 그런 피터까지 살해한 리플리가 그 순간 너무 쪼잔해 보였다. 피터의 건물 안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던 걸까. 리플리, 피터는 너보다 더 대단한 사이코패스였을지도 모른다고. 초라한 진실 대신 화려한 거짓을 택한 리플리의 한계가 안타까웠다.  

다섯 권이나 되는 원작소설에는 피터의 은밀한 건물도 언급될지 모른다. 언제 읽게 될지는 기약이 없지만.

리플리 5부작 세트 - 전5권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그책

[공연] 양림 재즈 페스티벌, Eldar Djangirov by 명품추리닝

2017년 10월 27~29일, 3일에 걸쳐 광주 양림동에서 재즈 페스티벌이 열려 금요일 저녁을 우아하게 즐겼다. 그 중심에는 아름다운 그랜드 피아노, 야마하 G3가 있었다.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엘다 장기로프(Eldar Djangirov). 견고하고 명료한 터치가 클래식적이면서도 리듬과 멜로디는 지극히 자유분방하다. 그래미상 후보라는 명성에 걸맞은 창의성과 테크닉의 소유자. 다만, 야외 무료공연의 분위기가 산만하여 연주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조용한 분위기의 실내 공연장에서 들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그런데 그 희망이 바로 다음 날 실현되었다. 운좋게 엘다 장기로프의 마스터클래스도 들을 수 있었던 것. 오스카 피터슨, 칙 코리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현재 그의 연주는 2-5-1 화성에서 벗어난 프리스타일에 가까웠다. 리듬 역시 5, 7박과 같은 혼합 박자를 주로 사용하여 혁신적인 느낌을 준다. 격식을 갖춘 공연장에서 집중하여 듣는 그의 연주는 훨씬 매력있고 개성적이었다. 테크닉 유지를 위해 매일 하농과 바흐를 연습한다는 엘다 장기로프. 나와 별다를 게 없는 연습 레퍼토리인 것 같은데 왜 실력은 이리도 차이가 나는 걸까.  

스탠다드 재즈 위주로 마스터클래스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으나, 그의 연주와 이론은 전공생들도 따라가기 힘들 만큼 혁신적이었다. 중간에 전공생들이 연주한 Auturm Leaves는 이날 들은 유일한 스탠다드 재즈였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두 연주자는 서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연주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소리를 주의깊게 들으며 호흡을 잘 맞추었다.  

재즈 공연은 크고 작은 4~5개의 무대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 못 간 아쉬움이 조금이나마 풀어진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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