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연습하는 곡 choux a la creme by 명품추리닝



3주 전부터 우에하라 히로미의 choux a la creme(슈크림 과자)를 연습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멜로디 진행과 히로미다운 속주가 매력적인 생기발랄한 재즈곡. 연습할 때마다 그 진행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감탄하는 중이다. 천재란 이런 거구나. 이전 the Tom and Jerry show는 1년도 넘게 연습했었는데, 이 곡을 암보하여 완주하려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외롭게 보내야 하는 걸까. 특히 어려운 부분이 2~3 군데 있어서 더듬더듬 부분연습을 해야만 한다. 슈크림 과자를 먹는 상상을 하면 좀 더 연주가 잘 될까, 또 다시 철 없는 망상으로 하루하루를 낭비하는 요즘이다. 

[영화] 완벽한 타인 (스포일러 주의) by 명품추리닝

흔히 사람들이 자아를 찾으러 여행을 떠난다고들 하지만, 지금의 내게 여행은 돈을 쓰며 관광을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자아는 오히려 그이의 쇼핑내역과 익명 댓글, 인터넷 검색어, 그리고 비공개하거나 삭제한 포스팅에서 찾는 게 빠를 게다. 그런 점에서 영화 <완벽한 타인>은 흥미롭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은밀한 자아를 유쾌하면서도 씁쓸하게 그려낸 작품이었으니까. 남에게 씌워진 얄팍한 가면이 핸드폰 하나로 벗겨지는 것을 보는 일은 관객의 입장에서 얼마나 짜릿하고 흥미진진한 경험인가. 

극중 성적 충동이 그나마 건강하게(?) 발현되는 인물은 문학 모임에서 자아를 찾는 가정주부 '수현(염정아)'일 것이다. 보수적인 남편 몰래 입는 야한 속옷, 인터넷에서 연재하는 불륜 소설, 문학적 취향이 비슷한 남자와의 온라인 교류는 그녀가 회색빛 일상을 버티게 해주는 힘으로 설명된다. 그 불륜 소설마저 자신의 남편을 모델로 썼다는 게 김이 빠지긴 했지만. (만약 내가 영화감독이었다면, 수현은 일반적인 불륜 소설이 아니라 피와 정액이 난무하는 게이소설을 집필해 거액을 버는 동인지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텍스트로 자신의 욕망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난 게 그나마 반가웠다.    

영화의 결말을 알게 되면, 맨 처음 이 위험한 게임을 시작한 사람을 다시 볼 수밖에 없다. 정신과 의사 '예진(김지수)'은 아마도 남편 '석호(조진웅)'의 외도를 의심해 이러한 게임을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바람을 많이 피우는 사람일수록 배우자의 부정을 더더욱 경계하는 법이니까. 예진이 남편의 35년지기 친구와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이 게임을 가장 먼저 제안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더 서늘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자신의 이면을 보여주지 않은 채 타인의 이면을 들여다보려 노력하고, 끝까지 자신의 불륜을 들키지 않는 영리함을 갖췄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월식의 이미지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바로 예진이 아닐까.     

영화는 파국적인 결말을 보여주면서도 (영화 <인셉션>의 오마주인) 반지의 회전 장면을 통해 또 하나의 현실적인 결말을 동시에 제시해 해석의 폭을 넓힌다. 주인공들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달은 매일 자신의 앞면만을 내보인다. 섣불리 뒷면을 보이지만 않는다면 대체로 평화로울 것이란 현실이 조금 씁쓸해진다. 

학원 연습실에서 by 명품추리닝

- 명품추리닝 님 다른 학원생들에게 엄청 유명해졌어요. 갑자기 실력 좋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재즈피아노 선생님의 말씀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두 번째 레슨이 있던 날의 대화였다. 취미생 위주의 학원 연습실에서 내 실력은 당연히 독보적이었고, 그것이 몇몇 원생들의 입에 오르내린 듯했다. 이제 곧 내 연주를 흠모하는 누군가가 연습실이나 로비에서 나에게 친근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올 것이리라, 라고 생각한 것이 벌써 한달 전의 일이다. 이상하다, 왜 아무도 말을 안 거는 걸까. 분명 오늘도 선생님이 나에게 똑같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아무래도 나에게는 상대방의 입에 발린 칭찬에 진심으로 감동하는 순수함이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 학원 원생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정말 대단하다. 토요일의 연습실은 일찍 선점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니까. 주말에 만날 친구가 없어 오전부터 연습실에서 노는 사람은 나뿐인줄 알았는데, 이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 상당수가 이런 유형인 것 같았다. 실력이 괜찮은 원생들도 가끔 보인다. 옆실에서 열심히 연습하는 소리를 들으면 핸드폰에 한눈을 파는 일도 자제하게 된다. 그렇게 다들 타인과의 대화보다는 스스로의 연습에만 몰두하기에 참으로 고요하면서도 열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결국 이곳에서 친구 사귈 일은 요원해졌지만, 그래도 그 분위기는 정말 마음에 드는 것.     

연습을 끝내고 귀가하는 길이 어두웠다. 마침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정류장에 운 좋게 바로 도착했다. 놓쳤으면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을 텐데. 덕분에 기분 좋게 귀가한 저녁이다. 내일은 맛있는 것을 먹고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러 가야겠다.  


  

새로운 재즈피아노 선생님을 만나다 by 명품추리닝

몇 주 전 인터넷 서핑을 하다 멀지 않은 지역에서 레슨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의 동영상을 발견했는데, 그는 내가 부러워하는 터치와 리하모니제이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순간 본능이 '이 사람에게 레슨을 받아야 해'라고 외쳤다. 그러나 밥벌이로 바쁜 시기에는 쉽게 시간을 낼 수가 없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9월말, 드디어 직장에서 부담스러웠던 업무가 끝나고 그이가 레슨을 하는 학원에 등록할 수 있었다. 주말 레슨 때마다 왕복 2시간을 소비해야 하지만, 재즈 불모지나 다름 없는 비수도권 지역에서 제대로 된 선생님을 만난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번에 등록한 학원은 성인전문 음악학원이라 분위기가 좀 더 세련되고 차분한 느낌이었다.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넓은 로비는 마치 카페처럼 테이블과 의자가 아늑하게 배열되어 있었는데, 이곳에서 분기마다 원생들이 음악 발표회를 한단다. 첫 레슨을 받기도 전에 설레며 무대에 오를 생각부터 하는 건 내가 김칫국을 잘 마시는 성격이기 때문이겠지. 로비에서 마주치는 원생들 역시 조용하고 섬세한, 그러면서도 예술적 열정이 느껴지는 사람들이라, 어쩌면 이곳에서 친구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조심스레 품어보았다. 

새로운 재즈피아노 선생님은 연주자로서도 강사로서도 많이 바쁜 사람이었지만, 여유롭고 차분한 태도로 내게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전수해주셨다. 여태까지 3번의 레슨 밖에 받지 않았음에도 기량 향상에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이 느껴졌다. 3번째 레슨이 있던 날, 일찌감치 다음 달 회비를 결제하고 내가 원하는 시간대의 레슨 스케줄을 선점했다. 레슨이 끝나자마자 배운 내용을 복기해야 큰 효과를 볼 수 있으므로, 레슨 후에도 1~2시간은 꼭 연습실에 있다가 귀가하는 습관을 들이고 있다.  

내 엉성한 인생에 '노력하면 나아진다'는 간단한 명제를 악기 연주처럼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인간관계에서는 불가능한 그것이 피아노에서는 가능하다. 정직한 노력이 통하는 일이라니, 21세기에 이 얼마나 감동적인 현상인가. 연습실을 나오니 하늘이 파랗다. 재즈피아노 잘 치는 할머니가 되는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가을이다.  
  

[공연] 조윤성 재즈피아노 콘서트 by 명품추리닝

지방에서 살다보면 가끔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유명 연주자를 코앞에서 보는 경우가 있다. 바로 지난 주에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의 공연이 있었던 것. 2014년의 카페 공연에 이어 두 번째로 감상하는 조윤성의 연주였다. 당시 카페에서는 디지털 피아노로 기타리스트와의 듀오 연주를 했기에 피아니스트의 역량을 한껏 발휘하기엔 한계가 있었으나, 이번 솔로피아노 연주는 야마하 그랜드로 연주자의 개성과 능력을 마음껏 보여주는 감동을 선사하였다. 델로니어스 몽크의 곡과 라벨의 '볼레로' 편곡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공연 중간에 그가 림스키 코르사코프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실제 연주는 들을 수 없어 조금 아쉬웠다. 조윤성이 연주하는 '세헤라자데'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도서]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 by 명품추리닝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 - 10점
조지 오웰 지음, 김영진 엮음/한빛비즈

특히 그가 경계한 것은 전쟁 중에 불거지곤 하는 무비판적 애국심 선동이었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조국에 이로운 일이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습관은 애국주의가 아니라고 오웰은 단언했다. 그건 국수주의이며 애국심과 헷갈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p.26~27

이런 셈법이 어리석은 이유는 누군가를 굶김으로써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유럽이 궁극적으로 어떤 정치적 합의를 하든지 간에 수년간 굶주림과 고통, 약탈, 무관심을 겪은 다음이다. 따라서 상황은 더 열악할 수밖에 없다. 주베르 경은 미래에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독일 아이들에게 식량을 주느니 우리 영국 아이들이 그 식량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게 '가장 현실적인' 견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1918년 당시 현실파 인물들의 주장은 휴전 후 독일을 봉쇄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독일에 봉쇄선을 세웠다. 그리고 1940년, 우리에게 폭탄을 떨어뜨린 독일 청년들은 그때 우리가 굶긴 그 독일 아이들이었다. p.74

BBC를 떠나고 얼마 후 작성한 글에서 오웰은 역사로 기록되는 사실이 거짓투성이라고 믿는 것보다 더욱 신경 쓰이는 건 '진실이 역사로 기록될 수 있다'는 믿음 자체를 우리 사회가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당장 머리 위에 떨어지는 폭탄보다 권력자가 '2+2는 5다'라고 말했을 때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미래가 더 두렵다는 얘기였다. 오웰은 언제나 그랬듯 진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p.83

정부 정책을 대중에게 알리고 설명하는 작업은 지금의 노동당 정부에게 쉬운 과제가 아니다. 뿌리 깊은 곳까지 정부에 적대적인 언론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p.107

"전쟁이란 어느 악을 선택할 것이냐는 물음이다. 나는 조국 영국의 제국주의를 겪었고, 그 폐해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전쟁 상대가 독일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제국주의라면 '차악'으로 영국을 지지하겠다." p.130

반대로 전쟁 중에 추천할 만한 오락거리는 게임, 스포츠, 음악, 라디오, 춤, 문학 같은 예술 분야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오락 행위 대부분은 누군가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얻는 대신 자기 자신이 오락성을 만들어내는 것들이다. p.137

내가 반대하는 건 위선이다. 무력은 수단일 뿐이라고 정당화하면서 특정 무력 수단에만 반대하고 불평하는 위선, 전쟁을 비난하면서 실제로는 전쟁을 유도하는 사회 구조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그런 위선 말이다. p.161

하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누군가를 '독일놈Huns'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그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는 게 덜 해로운 행위다. 그 누구도 일부러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입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죽음 그 자체가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일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데 나는 공감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100년도 채 안 되어 자연사로 죽지 않나. 진정한 악은 상대가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행위다. 전쟁이 문명의 본질을 파괴한다고 할 때 단순히 물리적 파괴를 말하는 게 아니다(따지고 보면 전쟁은 전세계적으로 생산능력을 끌어올리는 순이익을 낳기도 한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 때문도 아니다. 전쟁은 증오와 거짓을 확산시킴으로써 문명의 본질을 파괴한다. p.181

모든 국민은 자기 한 몸 누일 크기의 집을 갖는 게 바람직하며, 모든 농부는 자기가 경작할 수 있는 크기의 땅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 반면 도시 지역의 지주들은 그 어떤 기능도 하지 않으므로 아무 존재 이유가 없다. 지주라는 존재는 돌려주는 것 없이 일방적으로 대중을 착취할 방법만 찾아낸 사람이다. 이들은 집값을 올리는 원인이자 도시 구역 개선의 걸림돌이고, 아이들의 공원 출입을 막는 주범이다. 임대료 수금을 빼고 이들이 하는 일은 그게 전부다. p.229

설거지 한 무더기를 처리할 때마다 나는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놀라곤 한다. 인간은 바닷속을 여행하고 구름 위를 비행할 수 있으면서도 설거지처럼 시간을 잡아먹는 일상적 골칫거리 하나 없애지 못하고 있다. (...) 집안일을 개선하는 속도와 비슷한 속도로 전쟁을 일으키는 방법을 연구했다면 우리 인간은 이제야 막 화약이 뭔지 발견하는 수준 아니었을까. p.233~234

그렇다면 언론을 통한 의사표현의 창구가 모조리 관료들의 지배하에 놓인다는 뜻일까? 대중이 자신의 운명에 무관심하다면 그런 상황이 쉽게 닥칠 것이다. 신문, 잡지, 책, 영화, 라디오, 음악, 연극이 모조리 한 덩어리로 쓸어 담겨 '예술부'라는 거대 정부 조직의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사실 조직의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 물론 반가운 전망은 아니다. 사람들이 그 위험성을 일찍 깨닫는다면 이런 시나리오를 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p.274
100여년 전 태어났던 영국인 저널리스트의 글에서 놀랍게도 현재의 남북문제, 정치인의 위선, 언론의 부패, 부동산 투기, 가사노동, 표현의 자유, 문화계 블랙리스트까지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가, 조지 오웰이다. 그의 글을 읽으며 어쩐지 고 마광수 교수의 에세이가 떠올라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두 지식인 모두 비범한 통찰력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글을 썼지만, 한쪽은 존경받는 저널리스트로 가족들의 품에서, 다른 한쪽은 교수직 파면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다 홀로 생을 마감했으니. 부쩍 서늘해진 가을바람에 몸이 떨리는 저녁이다.  
   



[도서] 나를 보내지 마 by 명품추리닝

나를 보내지 마 - 10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민음사
공동 침실에서 마담과 있었던 일을 들려주자 토미는 상당히 단순한 설명을 내놓았다. 그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는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 그러니까 우리 중 아무도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무렵 우리 모두는 알게 되었다. 어쩌면 제대로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더 어렸을 때도 어떤 식으로든 그런 사실을 감지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노래를 그런 식으로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p.108

너희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랑도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가 정해져 있지. p.118~119

근원자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 학생들도 있었다. 우리의 근원자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나오게 하기 위해 기술적으로 필요한 존재였을 뿐,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루스는 언제나 이런 생각을 가진 편이었고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그렇다 해도 누구의 근원자든 간에 근원자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그것에 무심할 수는 없었다. p.197
장기기증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클론들의 짧은 생이 마치 성장소설처럼, 추리소설처럼 읽힌다. 디스토피아를 다룬 SF 중에서도 가장 소박하고 순종적인 캐릭터로 이루어진 슬픈 이야기. 게다가 주인공 캐시는 운명의 상대와도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한 채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세월을 낭비한다. 그것도 그녀의 단짝 친구가 벌인 이간질 때문에.   
나는 나서서 토미를 변호하고 싶었지만 루스의 화를 돋우지 않고 토미의 기분을 좋게 만들 적절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루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당시에도 치명적이었지만 그 간접적인 파장이 얼마나 멀리까지 미칠지에 대해 그날 그 교회 뜰에서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루스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이 아냐, 자기. 여기 캐시도 자기의 동물 그림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데 같은 의견이라고." p.270

그때 나는 눈물이 터질 것 같다든지 이성을 잃을 것 같다든지 하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몸을 돌려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로 마음 먹었을 뿐이었다. 그날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나는 그것이 지독한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당시 내가 무엇보다도 겁났던 것은 그들 중 한 사람이 먼저 자리를 떠서 나머지 한 사람과 내가 남게 되는 것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우리 중 하나가 화를 내서 그 자리를 뜨는 것 외의 다른 가능성은 없는 것처럼 여겨졌고, 나는 내가 먼저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p.272

"그래서 말인데 캐시, 토미가 너를 그런 관점에서 보고 있지 않다는 걸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 걘 진정으로 너를 좋아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어. 하지만 너를, 그러니까 여자 친구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여자로 보진 않는다는 거야. 게다가......" p.278
그런 루스도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게 된 걸까? <남아 있는 나날>에서 집사 스티븐스가 그랬던 것처럼.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에서는 후회와 반성이 인간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킨다는 믿음이 보여서 좋다. 하지만 따뜻한 인간애가 비극 속에 녹아들어가니 더 애달픈 느낌. 
"너희 둘은 줄곧 함께 있었어야 했어. 그런 사실을 몰랐던 게 아니야.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줄곧 너희 둘을 떼어 놓았지. 너희 둘에게 그런 나를 용서하라는 게 아니야. 내가 하려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이제라도 사태를 바로잡는 거야. 내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걸 너희가 바로잡으라는 거라고." p.319

'그래, 이제 우리가 이걸 하고 있군. 이렇게 돼서 기뻐. 하지만 이렇게 늦게야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안타까워.' p.328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그것이 과거 코티지에서 그의 그림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모든 사건을 없던 일로 하겠다는 뜻임을 깨닫고 안도와 감사와 순전한 기쁨을 느꼈다. 그가 왜 동물 그림을 다시 꺼낸 것인지, 얼핏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질문 이면에 얼마나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줄곧 그 일을 잊고 있지 않음을 토미는 그런 식으로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자기는 원한 같은 것을 품지 않았다고, 나름대로 준비하느라 바빴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p.331

[전시] 루나파크전: 더 디자인 아일랜드 by 명품추리닝


[전시] Weather: 오늘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by 명품추리닝


2019 다이어리 후보들 (계속 업데이트) by 명품추리닝

추석 연휴에 대학로 텐바이텐 본점에 갔다가 벌써 2019년도 다이어리 코너가 생긴 것을 발견했다. 아직 출시된 신제품은 많지 않아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이어리 샘플을 뒤적거렸다. 그리하여 며칠 전까지 기존에 쓰던 '달과 노트'를 이어 사용하겠노라는 다짐은 온데간데 없이, 이번에도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으로 2019년 다이어리 후보군을 선정하고야 만다.   

먼슬리와 프리노트의 간결한 구성이 심플한 표지와 잘 어울리는 게 마음에 드는 제품이다. 하지만, 내지의 두께(모조지100g), 프리노트의 절반을 가르는 가로줄이 조금 신경쓰인다. '달과 노트' 먼슬리 150g처럼 파격적인 두께의 제품은 없는 것인가.  

풀디자인에서 2019년부터 야심차게 내놓은 기억보관함 먼슬리 버전. 심플한 디자인과 적당한 내지 두께(120g), 풍성한 라인, 그리드, 무지 페이지가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리드 한 칸이 6.7mm로 불렛저널보다는 원고지에 적당한 사이즈라 실용성이 떨어질듯. 현재 내가 만들어 쓰는 불렛저널은 한 칸에 3.8mm 정도로, A5 한 페이지에 제목과 31칸을 모두 기록할 수 있다.  

모조지 100g의 얇은 두께, 필요 없는 위클리 116 page, 필요하지만 각각 16 page 밖에 없는 라인노트와 무지노트가 모두 내 취향 밖임을 보여주는 7321 앨리스 다이어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빈티지하면서도 감각적인 디자인과 Project Schedule에 반할 수밖에 없는 기묘한 매력을 가졌다. 디자인의 힘은 위대하구나.  

모든 페이지가 150g 모조지로 이루어진 O-Check의 먼슬리 플래너. 프리노트가 좀 더 많았으면 좋았겠으나 이 두께의 내지로 먼슬리 플래너가 나온 것만으로 감사하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먼슬리 페이지의 2018년 11, 12월 부분을 줄이고 프리노트를 늘리는 것. 거기에 프리노트 두께를 120g으로, 프리노트 페이지를 90 page 이상으로 하면 완벽할 듯하다. 아, 내 이상적인 다이어리는 언제쯤 나올 것인가.  

4번 제품과 마찬가지로 모든 페이지가 150g로 제작된 먼슬리 플래너. 공교롭게도 전체 페이지 구성은 물론 프리노트 페이지수까지 O-CHECK 제품과 같다. 역시 먼슬리 페이지가 2018년 11월부터 있는 것은 보기에 거슬리지만. 그래도 작년 이맘때에 비하면 올해에는 재미있는 구성의 먼슬리 플래너가 더 많이 보여서 흥미롭다.   

2019년에는 예상치 못한 강력한 후보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먼슬리 160g, 라인노트 120g이라는 두께를 자랑하는 Livework 먼슬리 플래너. 프리노트가 80p 이상이면 완벽했겠으나, 어쨌든 현재까지 내 취향에 가장 부합하는 제품이라 반갑다.  

'먼슬리+라인노트'의 간결한 구성에 120g 모조지까지 마음에 드는 새로운 후보 어썸 플래너. 다만 라인노트 46p가 내게 너무 부족하게 다가온다. 현재 쓰고 있는 2018 달과노트의 프리노트는 97p인데, 나는 11월까지 이미 80p 이상을 사용한 상태. 달과 노트보다 예쁜 디자인의 다이어리는 많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달과 노트 이상으로 내 기록습관에 맞는 제품은 나오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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