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 by 명품추리닝

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 - 6점
존 파웰 지음, 장호연 옮김/뮤진트리


비전공자들의 입문서로는 나쁘지 않지만, 전공자의 입장에서는 따분한 면이 많은 책이다. 특히 물리학과 연관된 부분에서는 과거 음악이론시험이 생각나서 더더욱 지루해졌다. 또한 음정이나 음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피아노로 직접 듣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편하다. 저자의 역량 부족이라기보단 책이라는 매체가 가진 한계 때문일 것이다. 다행히 나는 입문자들에게 추천할만한 동영상을 몇 가지 알고 있는데 아래 영상도 그중 하나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일반인들을 위한 입문서인 만큼 '음악성에 관한 오해'에 관해 알기 쉽게 풀어쓴 부분은 마음에 든다. 아마추어 음악가로 살고 있는 나에게도 용기를 주는 내용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무 살이 넘으면 악기를 배우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편 어릴 때 음악을 배우지 않았거나 악기를 배우는 일이 고역이었던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를 '음악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악기 연주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에게 도자기 제작이나 뜨개질 같은 다른 솜씨에 대해 묻는다면 자기가 그런 일에 재능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장비를 구입하고 수업을 들으면 자기도 얼마든지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전문가들과 경쟁할 수는 없겠지만, 웬만한 작품은 만들 수 있고 배우는 과정이 즐거우리라고 믿는다. p.269

음악에 관한 또 하나의 잘못된 오해는 악기를 배우는 데 수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기대치가 대단히 높다면 이는 맞는 말이다. 베토벤의 소나타를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고 싶다면 아마도 10년 이상, 그것도 하루에 한 시간 이상 꾸준히 연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밥 딜런의 노래를 캠프파이어에서 선보이려면 하루에 몇 분 연습하는 정도로 한 달이면 충분하다. p.267

그러므로 "나도 악기를 연주할 줄 알면 참 좋을 텐데. 난 음악적이지 않잖아" 하고 생각하는 분들은 마음 놓고 토요일에 악기점에 들러 악기를 구입하시라. 음악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방법만 배우면 누구든지 음악가가 될 수 있다. 물론 누구보다는 못하고 누구보다는 잘하겠지만 그래도 음악가이다. p.271
결국 [남이 치는 쇼팽에튜드보다 내가 치는 학교종이 땡땡땡이 아름답다]는 태도가 모든 연주자에게 필요한 것. 나역시 한동안 쉬었던 연주영상 촬영을 재개해야겠다.  

2019 불렛 저널 by 명품추리닝

2019년 다이어리를 구매하자마자 새 불렛 저널을 붙이고 밀도 높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패기 넘치는 시작과는 다르게 갈수록 게으르고 엉성한 삶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작년의 내 불렛 저널에 대한 열정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래도 이 게으른 삶 덕분에 지난 해 그토록 심하게 앓았던 봄감기를 만나지 않았으니, 이로써 사람은 너무 열심히 살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다행히 3월부터는 108배도 다시 주 4회씩 꾸준히 실행했는데, 아쉽게도 주 5일 야근을 했던 지난 주는 이 루틴을 지키지 못했다. 이제 바쁜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니 더 이상 심한 연속 야근은 없을 거라 믿는다. 그렇게 기도하며 108배를 해야지. 그리고 몇 개월 후에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 스트레칭도 예전처럼 자주 해야겠다. 그때까지 너무 굳지 말아줘, 내 뻣뻣한 근육들아.  

최근에 어느 실력자가 그려준 내 캐리커쳐. 마치 마약 먹은 밤의 여왕 같다. 스타벅스에서도 저 캐리커쳐에 쓰인 닉네임을 그대로 사용하는데, [4차원 공주님, 음료 나왔습니다] 하는 멘트를 들은 직장 동료가 어찌나 웃어대던지. 좀 더 고상한 닉네임으로 바꿔야 하나 살짝 고민했지만, 이 캐리커쳐가 너무 예뻐서 그냥 같은 닉네임을 유지하겠노라 마음먹었다. 내가 앞으로도 4차원 할머니로 잘 늙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by 명품추리닝

5월 연휴, 오전부터 108배를 하고 피아노를 조금 뚱땅거리다 엄마와 샤롯데시어터로 향했다. 어머니께 드리는 어버이날 선물이자 스스로에게 주는 어린이날 선물로 올해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골랐다. 샤롯데시어터는 이번에 처음 가봤는데, 공교롭게도 지난 주 당첨되어 엄마가 관람한 오페라 <베르테르>의 여주인공 '샤를로테'라는 이름으로부터 이 극장명이 탄생한 거라 했다. 공연시작 1시간 전, 엄마를 극장 내 카페에 일찌감치 모셔두고 혼자 티켓팅을 하러 다녀왔더니 어느새 카페도 만석이 되어 있었다. 덕분에 공연 전에 편안한 좌석에서 엄마와 수다를 떨며 작품에 대한 기대를 높일 수 있었다.  

공연 전날에는 원작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완독하고, 유투브로 2004년 조승우의 공연까지 챙겨보았다. 결론적으로 뮤지컬을 관람하는데 원작소설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내 나쁜 기억력으로 등장인물을 외우는 데는 조금 효과가 있었다. 유투브 영상은 화질이 너무 안 좋았으나, 깊은 밤 엄마와 오랜만에 같은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뮤지컬 예습이 끝났다. 
  
<지킬 앤 하이드>의 조승우, 홍광호, 박은태는 유명하지만, 나머지 배우들은 검증되지 않았다. (조, 홍은 표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지난 여름 <프랑켄슈타인>에서 전동석이라는 배우에게 반한 우리 모녀는 이번에도 그가 출연하는 회차를 선택, VIP석이라는 적지 않은 금액을 올해 새롭게 캐스팅된 막내 지킬에게 과감히 배팅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빅터와 쟈크 1인 2역을 훌륭하게 소화하였으니 지킬과 하이드도 잘 해낼 것이라 믿고.  

그리고 전동석은 우리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컨디션도 최상이었는지 [This is the moment]의 후반부 가사 '지금 이 순간 나만의 길, 당신이 나를 버리고' 부분을 G#까지 높여 힘있게 불렀고, [Alive]에서 하이드의 목소리를 베이스로 중후하면서도 기괴하게 잘 표현하였다. [Confrontation]에서는 하이드에 비해 지킬이 많이 약한 것처럼 보였는데, 이 연출조차 전체 스토리에 조화롭게 녹아들어간 느낌. 특히, 테너와 베이스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창법이 훌륭했다. 그의 저음이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진 부분은 [Sympathy Tenderness Reprise]로, 앞에서 루시가 사랑스럽게 부른 멜로디를 무섭도록 잔혹하게 바꾸었다. 완벽한 어린이날 선물을 받은 기분. 커튼콜에서는 기립박수가 오래도록 터져나왔다.  
  
공연이 끝나고 포토존에서 엄마의 사진을 찍어드렸더니, 엄마가 내 찬란한 효도의 증거를 카톡으로 동네방네 자랑하셨다. 작년 <프랑켄슈타인> 때만 해도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싶다던 울엄마가, 이제는 <지킬 앤 하이드>를 한번 더 보고 싶으시단다. 동지킬, 잘해줘서 고마워요. 다음 시즌 때 엄마와 다시 만나러 갈게요.


ENDGAME을 준비하는 자세 (스포 없음) by 명품추리닝


[도서] 언어 공부 by 명품추리닝

언어 공부 - 8점
롬브 커토 지음, 신견식 옮김/바다출판사

세 명이 배우면 결과가 가장 좋은데, 학생들 사이에 노력을 하게 만드는 일종의 경쟁심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한 세 명의 모임은 격식이 필요하지 않아서 전형적인 외국어 수업에서 생기는 긴장과 인위성 없이 편안하게 배울 수 있다. p.81

중요한 단어라면 뒤에 다시 나올 테고, 문맥에서 의미가 명확해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함으로써 습득하는 단어는 기계적으로 사전을 찾아서 낱말 뜻을 멍하니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남는 것 같다. p.101

단어와 문장의 정확한 억양을 익히는 것은 더 중요하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녹음, 녹화하고 반복적으로 다시 틀면 머릿속에 효율적으로 새겨 넣을 수가 있다. 영원불멸의 규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이것을 짧은 시간 동안, 대신에 최고의 강도로 수행해야 한다. 마음은 어제의 경험이나 내일의 희망 사이를 헤매고 다니면서 몸만 라디오 옆이나 녹음기 옆에 앉아 있지 마라. p.112

언어 학습에서 실패를 피하는 훌륭한 방법은 바로 독백 연습이다. 이 실내 놀이는 어휘를 풍부하게 하고 확고하게 만드는 유명한 학습법이 될지도 모른다. 비슷한 말을 누가 더 많이 늘어 놓나 하는 등이다. 내가 참여했던 가장 최근의 게임은 다음과 같았다. '술에 취한'이란 뜻의 영어 drunk의 동의어를 누가 가장 많이 알까,가 주제였다. 나는 fuddled, tipsy, inebriated, high로 결승까지 진출했고 blotto, piffliated, intoxicated로 낙승했다. 혼자만의 경기였으니 금메달은 따지 못했다. 로마로 향하는 심야 고속버스가 덜커덩거리는 바람에 잠이 오지 않아서 고안해낸 시합이었다. p.153

교육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가치 있는 실수는 자기가 직접 저지른 것이다.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거나 실수를 해서 비난을 받으면 뇌의 정서적 영역에서 궁금증, 짜증, 공격성이 일어난다. 이런 모든 것이 지식을 확실히 단단하게 만든다. p.169
작년에는 <겨울왕국>을 암기하며 영어회화를 익혔고, (당연히 다 못 외웠지만) 올해는 <미녀와 야수>로 넘어가 대사를 따라 말하고 있다. 매일 저녁 애니메이션을 재생하는 동안 108배와 샤워, 마스크팩과 헤어드라이까지 마치면 야수가 인간으로 변해있곤 한다. 저자가 지적한대로 나는 '몸만 녹음기 옆에 앉아'(112) 있을 때가 많은데,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재생 버튼을 누른다. 영어가 안 들려도 음악이 들려서 기분이 좋아지니까. 어쨌든 다음 피아노 연주회를 할 때에는 미국인 친구 J를 꼭 불러야겠다. 그러면 이 친구와 대화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듣는 <미녀와 야수>에 좀 더 집중할 테니. 

<언어학습 십계명> p.198~200

하나.
언어를 매일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라. 시간이 짧다면 최소한 10분짜리 독백을 만들어보라. 이 점에서는 아침 시간이 특히 소중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말을 잡는다!

둘. 
학습을 향한 열정이 너무 빨리 식어버린다면 공부를 너무 몰아붙이지 말되, 한 번에 그만두지도 마라. 다른 방식의 공부로 옮겨가라. 예컨데 독해를 하는 대신에 라디오를 듣거나, 작문을 하는 대신에 사전을 뒤적이거나 해도 좋다.

셋.
말을 고립된 단어로 익히지 마라. 그보다는 문맥 속에서 익혀라.

넷.
교재 구석에 쓸 만한 표현을 적어놓고 대화해서 '미리 만들어놓은 요소'로 사용하라.

다섯.
뇌가 피로에 지쳐있다면 번쩍하고 지나가는 광고 표지판, 현관의 번지수, 엿들은 대화의 단편적인 내용 등을 재미로 번역해보라. 휴식이 되고 긴장이 풀린다.

여섯.
교사가 고쳐준 것만을 암기하라. 교정 및 수정을 받지 않았다면 자기가 쓴 문장을 계속 공부해선 안된다. 실수가 머릿속에 뿌리 내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곱.
관용적 표현은 늘 일인칭 단수로 암기하라. 예를 들면, "I am only pulling your leg(나는 너에게 장난을 치는 것 뿐이야)"

여덟.
외국어는 성곽이다. 전방위에서 포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문, 라디오, 더빙되지 않은 영화, 기술문서 혹은 과학논문, 교재 이웃의 방문객 등 모든것을 활용하라.

아홉.
실수가 두렵다고 말하는 것을 꺼리지 말되, 틀린 것은 대화 상대자에게 고쳐달라고 요청하라.

열.
스스로 언어 천재라고 굳게 믿어라. 실은 그 반대라는게 드러난다면 통달하려는 그 성가신 언어나 여러분의 사전들 혹은 이 책에 불만을 쌓아 두어라. 스스로를 탓하지 마라.

[도서] 머큐리 (스포일러 주의) by 명품추리닝

머큐리 - 5점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열린책들
외딴 섬의 거울 없는 집, 그곳에 스스로를 가둔 흉터난 얼굴의 소녀, 소녀에게 집착하는 노인의 모습이 영리한 간호사의 시선으로 서술된다. 노인과 소녀의 관계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루밍 성폭력이고, 소녀가 노인에게 갖는 감정은 스톡홀름 신드롬에 가깝다. 안타까워라. 아무리 70 넘은 노인이라지만 막대한 부와 인자함을 어필하여 소녀를 유혹해도 될 것 같은데, 이 자존감 낮은 할아버지는 기만과 감금으로 소녀를 곁에 두는 방법을 택한다. 남은 것은 변명과 자기합리화로 점철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뿐. 긴 변명을 읽으며 깊은 연민이 들었다. 
"나는 엄청난 공을 들여 이 낙원을 건설했소. 그렇소, 이곳은 낙원이오. (...) 밥 먹듯이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우리 세기에, 용인되지 않는 내 욕망을 보호하기 위해, 내 영원한 이브를 감추기 위해, 나에게서 그녀를 앗아 갈지도 모르는 뱀의 무리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래야만 했소. 그러니 도덕의 절대적 명령에 따라 날 심판하지 말고 프로메테우스의 잣대로 내 공로를 재보시오." p. 173~174


엄마의 영어공부 by 명품추리닝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동안 간병으로 고생하셨던 엄마와 이모는 지난 겨울 함께 패키지로 유럽여행을 다녀오셨다. 직장에서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는 중에 엄마가 카톡으로 보내오는 에펠탑이나 루브르 박물관의 사진이 얼마나 여유롭고 재미나게 느껴지던지. 역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돈이 있어야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모양이라고, 나는 작은 월세방 구석에 앉아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3년전 미국인 며느리를 들인 엄마는 그때부터 EBS 영어회화 인터넷 강의를 듣기 시작했고, 해외여행을 가면 종종 그동안 배운 영어를 구사하신다. 이번에 엄마가 탄 비행기에는 20명 남짓한 패키지 여행객들이 함께 있었는데, 어떤 외국인 남자가 엄마 뒤에 있던 한국인 커플에게 [그 자리는 내 자리이다]라며 자신의 티켓을 보여주었고, 커플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상황이 펼쳐졌다. 당황해하는 중장년층 관광객들 사이에서 엄마가 나섰다. 그 외국인에게 [이들은 일행이니 당신 자리와 좀 바꿔주면 안되겠느냐]고 영어로 부탁한 것. 외국인이 흔쾌히 자리를 바꿔주자 뒷자리의 커플은 연신 엄마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는데, 알고 보니 그 커플이 하필 불륜 사이였단다. 뭐, 어쩌겠는가. 당사자들은 절실한 로맨스의 주인공일 텐데. 

어쨌든 엄마는 이번 여행으로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한층 높아졌다고 한다. 올해는 오라버니의 미국 출장에도 따라가 더더욱 수준 높은 영어회화를 구사하겠노라는 포부도 다진 상태. 나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영어회화를 시작하긴 했는데, 게으른 몸이 따라주질 않고 있다. 렛잇고, 렛잇고, 아이 돈 케어. 오늘은 10분이라도 말하기를 해보고 자야지. 

[도서] 앙테크리스타 by 명품추리닝

앙테크리스타 - 7점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문학세계사

첫날, 그녀가 웃는 걸 보았다. 순간, 나는 그녀가 알고 싶어졌다. p.5
소설의 첫머리만 읽고 평범한 소년의 첫사랑 이야기를 예상했지만, 흥미롭게도 두 16살 소녀들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조용한 아웃사이더 블랑슈의 집에 찾아온 활발하고 영악한 크리스타. 블랑슈의 집에 하숙한 첫날 나체 신고식을 치루는 크리스타의 기개가 보통이 아니다. 이에 주눅든 블랑슈가 점차 크리스타를 상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성장소설 답게 그려진다. 
참된 시선에는 선입견이 담기지 않는 법이다. 진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면 펄펄 끓는 원자로를 보았을 것이며,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 채 화살과 과녁만을 찾고 있는 활을 보았을 것이고, 그 두 가지 보물을 갈구하는 절규를 들었을 것이다. p.72
'화살과 과녁 없이 시위만 팽팽하게 당겨진 활'은 청소년기를 상징하겠지만, 나이에 상관 없이 삶에 대한 물음을 가득 품은 사람이라면 어울릴 만한 문장이다. 호기심과 동경심에 매력적인 친구를 집에 들이고, 크리스타와 대립하다 결국 그녀를 자신의 삶 밖으로 몰아내는 사이 블랑슈는 한층 성장한다. 외로움을 견디며, 그것을 자기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캐릭터는 언제나 애틋하면서도 매력적이다.  
그런데 나는 지배자니 피지배자니 하는 이야기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따분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래서 내게 남자건 여자건 친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나 학교 밖에서나 우정이라는 고귀한 이름이 쌍방의 동의가 없는 모호한 예속관계나 의도된 모욕, 항구적인 쿠테타, 역겨운 굴종, 심지어 희생양을 만드는 행태들에까지 결부되는 것을 너무도 자주 보았다. p.165 
     


가와이 그랜드 & 야마하 그랜드 by 명품추리닝

재즈피아노 학원에 가는 길에 꽤 규모가 큰 악기사가 하나 있는데, 항상 문이 닫혀 있어서 그 앞을 흘끗 스쳐보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평일 휴가 날, 다음 달 레슨 등록을 위해 학원에 다녀오는 중 드디어 악기사 문이 열린 것을 확인했다. 절로 환호성이 나왔다. 알고 보니 평일에만 문을 여는 매장이라 주말에 그 앞을 지나다닌 나에게는 내부 구경을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었다. 역시, 휴가 때 놀지 않고 학원 가서 연습한 보람이 있었어.  

악기사의 주력 모델은 가와이 피아노이다. 반짝반짝한 가와이 그랜드 신품이 5대, 중고 야마하 그랜드가 2대 진열되어서 음색을 비교해가며 이것저것 연주하는 재미가 있었다. 전시된 가와이 그랜드 중에서 가장 고가의 모델은 무려 4,400만원이다. 세상에, 야마하 C7x보다도 비싸다니, 넌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거냐. 

세상에 그랜드는 많고 내 그랜드는 없다. 덕분에 악기 매장에 자주 찾아가 사지도 못할 그랜드를 시연하며 처음 보는 직원들 앞에서 넉살만 늘고 있다. 

지방의 악기 매장 직원들은 대체로 서울보다 친절한 편이다. 유동인구가 적으니 피아노를 괴롭히는 진상 고객들이 거의 없어서일 것이다. 이곳에서 내가 재즈를 연주하자 매니저 님이 소리가 잘 울려퍼지도록 피아노 음향판 뚜껑을 열어주셨다. [재즈 연주에는 야마하가 가와이보다 더 나을 거예요]라는 세심한 조언까지 덧붙이면서. 연주 후 매장을 나와 밤바람을 맞으며 버스를 기다렸지만, 추위를 크게 느끼지는 않았다. 봄이 온 모양이었다.    

2019 직장과 집 by 명품추리닝

새로 옮긴 직장을 따라 이사한 집의 월세는 이전보다 5만원이나 비쌌다. 그런데 왜 방은 더 낡고 좁아진 걸까. 희미한 곰팡이 냄새까지 나는 방에 들어설 때마다 행복지수가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출근을 하기 위해서는 버스 두 정거장 거리를 걸어야 하기에 요즘은 아침에 10분씩 일찍 일어나고 있다. 모르는 동네로 이사하면서 충분히 방과 위치를 살펴보지 않고 계약한 내 실수다. 그래도 1년간 어떻게든 적응을 하고 살아야 하므로 열심히 청소를 하고 각종 탈취제와 향초를 구매했다. 내년에는 돈이 더 들더라도 좀 더 쾌적한 곳으로 이사하리라 마음먹었다. 

반면, 직장은 보다 여유롭고 전문적인 환경으로 바뀌었다. 나처럼 단순하고 사회성이 모자란 사람도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하며 일할 수 있는 곳이다. 자신의 분야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동료로 만나 이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고 유익하다. 5월까지는 업무로 바쁘고 야근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사람 때문에 힘든 일이 (아직까지는) 없어서 출근길이 가볍다. 한가한 시간에 커피를 들고 산책하거나, 작은 도서관에서 읽을 만한 책을 고르거나, 세련된 음악 취향을 지닌 동료들에게 새로운 음악을 소개받는 일들이 모두 직장에서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새로운 연습실에 야마하 그랜드가 있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퇴근 후에 연습실에 틀어박혀있는 시간이 좀 더 늘어났다. 다음 달 재즈 레슨을 재개하기 전까지 열심히 혼자 연습해둬야지. 연습 후에는 다시 곰팡이 핀 작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이렇게 돈을 모으면 내년에는 엄마와 여유롭게 북유럽 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궁상맞은 일상의 주름 사이사이, 작은 즐거움의 조각을 찾아 누리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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